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탐보라 화산 (문단 편집) == 인명 피해 == 많은 기록이 소실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를 산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기후의 일시적 요동으로 인해 미친 피해는 더욱 판가름하기 어려운 법. 탐보라 화산 인근 지역의 피해는 말 그대로 참혹했다. 인근 마을과 부족국가가 모두 폐허가 됐다. 당시 일종의 구호팀(mercy-finding mission) 기록에 따르면 "이 참상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생존자들은 먹을 걸 찾아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위생이 악화되고 물이 오염됨[*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은 살기 위해 화산재가 섞인 물을 마시고 있었다.]과 동시에 영양부족에 시달리자 사람들은 병에 걸렸다. [[설사]]는 다반사, 굶어 죽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화산 가스 중에는 [[플루오린]]도 섞여있었으며 약 18 메가톤이 쏟아졌었다. 이 플루오린은 땅에 섞여들어가 가축을 죽였고 인간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미세한 화산재 먼지는 기관지염을 일으켰음에 틀림없었다.[* 실제로 탐보라 화산과 물리적 양상이 비슷했던 [[피나투보 화산]] 분출 당시에 피난캠프에서 수백명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추산에 따르면 질병에 대하여, 홍역으로 31%, 설사(탈수)로 29%, 호흡기 질환으로 22% 정도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근거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탐보라 인근 지역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작게는 60,000명, 많게는 120,000명 정도로 보고 있다.'''[* 게다가 화산으로 인한 직접 피해(화산쇄설류나 화쇄난류, 화산성 쓰나미)는 '''최소 20,000명에서 최대 40,000명을 추산된다.''' 게다가 더 끔찍한 건 '''앞에 저 피해는 겨우 1815년에 기록 된 내용이다.'''][* 2018년 현재(인구수 약 7,600,000,000명) 기준으로 해도 엄청난 규모인데, 저때의 세계 인구는 겨우 '''10억'''으로 지금의 인도보다도 인구가 적었던 시절이다. 즉 지금으로 환산한다면 '''최대 100만 명''' 정도라는 어마어마한 수치가 나온다. '''화산 근처에서만.'''] 유럽과 미국의 기록에서는 1816년과 1817년의 농사가 여름의 서리 때문에 망했다고 전한다. 뉴잉글랜드의 많은 가축은 먹을 게 부족해서 1816~1817년 사이의 겨울을 버티지 못했다. 영국에서의 피해도 사실 매우 컸는데, 작물이 비실비실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음식이 없어 구걸을 해야했고, 북쪽과 남서쪽 아일랜드는 밀, 오트, 감자 수확에 실패하여 기근에 시달렸다. 독일에서도 이는 심각했는데, 특히 시골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2년 연속으로 처참한 흉작으로 인하여 극심한 식량난의 고통에 시달렸다. 즉, 서유럽과 중유럽 전체가 2년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 여파로 여러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들 폭동의 구호는 "빵이 아니면 피를! (Bread or Blood)"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유럽 동쪽의 러시아와 미국의 경우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은 영향이 적었던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와 미국 애팔래치아 서쪽 지역에서 재배된 대량의 밀이 무역을 통해 미국의 뉴잉글랜드와 유럽으로 수송되며 아예 식량 자체를 구할 수 없는 최악의 파국만은 면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정부 차원에서 대량의 식량을 수입하여 수입가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하여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했고 독일의 경우 정부가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사회 지도층에서 자발적으로 식량을 수입하여 낮은 가격에 판매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하게 인상된 식량 가격을 빈민층은 지불할 수 없었고 결국 유럽 전체에서 아사자가 급증하였다. 남아시아의 인도에서도 탐보라 화산 폭발로 기후 변화가 나타나면서 몬순 현상이 교란되어 식량 생산이 어려워지며 고통받았고 [[청나라]]의 경우에도 남서부 운남 지방에서 탐보라 화산 폭발로 인한 남아시아 몬순 현상이 교란된 여파가 미치면서 1816~1817년의 2년간 극심한 냉해가 지속되었고 대흉작으로 인한 식량 부족으로 아사자가 속출했다. 하필 운남 지방은 1815년에 가뭄으로 흉작이 든 상태여서 잉여 식량이 부족해진 상황이었는데 여기에 다시 2년간 대흉작이 들면서 현지 지방정부 차원에서의 구호 대책 실행으론 식량 부족 문제의 해결이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운남 지방이 가장 피해가 컸으나 청의 다른 지방에서도 식량 생산이 저하되어 당시 청 조정에서도 파국적인 식량 부족에 직면한 운남 지방을 구호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유럽이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면서 유럽인의 미국으로의 이민이 대폭 증가하였고 북미 지역 내에서도 역시 극심한 냉해로 식량 생산이 힘들어져 고통받던 캐나다와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을 떠나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으로의 이주가 급증했다. 덕택에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에서는 뉴잉글랜드와 유럽으로 밀의 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밀가격이 폭등하여 경제가 활성화되고 여기에 대규모의 이주민이 들어오면서 도시가 급증하고 농토가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급격한 개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즉, 미국의 서부 개척이 가속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미국 경제의 버블로 이어졌는데 문제는 1818년에 유럽과 미국 뉴잉글랜드의 기후가 회복되어 식량 생산이 정상화된 것이다. 이들 지역에서는 식량 생산이 정상화되며 밀의 수입이 급감하였고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지역에선 밀의 수출이 급락하면서 밀가격이 폭락하였다. 결국 1819년에 미국의 경제 버블은 붕괴되고 미국에서의 첫번째 경제 공황이 일어났다. 한편 이 기근으로 인해 1816년에서 1819년에 걸친 심각한 전염병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티푸스와 페스트였다. 벵갈의 콜레라 유행도 1816년에 일어났다.[* 벵갈의 경우 콜레라 유행이 탐보라 화산 때문인지 학설이 대립했으나 2010년대로 넘어와서 최근 연구 결과는 탐보라 화산 폭발로 남아시아에서도 몬순 현상이 교란되는 극도의 기상 이변이 일어났던 것이 밝혀졌고, 이런 몬순 현상의 교란이 그 전보다 사람에게 더 치명적인 콜레라의 변종 발생을 벵갈 지방에서 유도하여 대규모 콜레라의 유행을 가속화했다는 학설이 학계에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특히 벵갈의 콜레라는 무역 항로를 타고 전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20년간 어마어마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여기에 유럽의 아일랜드에선 800,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티푸스에 시달렸으며, 44,300명이 기근과 이질(Dysentery), 열병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는 나폴레옹 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피해가 더 컸다. 게다가 아일랜드는 영국 정부의 자유방임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어떤 구호대책도 없었던 것이 피해를 키웠다. 결국 탐보라 화산 폭발로 인한 극심한 2년간의 냉해를 포함한 기후 변화로 나타난 대흉작이 발생하여 이로 인한 식량부족과 전염병으로 유럽과 미국, 그리고 아시아에서 수백만명~수천만명이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